충남 서천교육지원청 교육과장 신경희

내가 근무하는 교육청은 규모가 작다. 관내 학교라야 고작 34교다. 여교장은 단지 7명뿐이다.‘남자교사 할당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여교사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지역마다 여교장 수는 고작 20%정도이다. 그러고 보면 여성 관리직은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최근, 김지철 충남교육감의‘교육발전 신 성장 동력은 여성’이라는 기고 글을 읽었다. 글의 취지에 완전 공감됐다. 불끈 힘도 솟았다.

여기서 여성 관리직 비율을 논하려는 것은 아닌데, 글 문을 여는 방향이 이상스레 흘러버렸다. 지난 주 어느 날. 여름방학도 다가오고 그동안 이모저모로 수고해 주신 관내 여교장님들과 간단한 점심자리를 하게 됐다. 너, 나 할 것 없이 바쁜 일상으로 오랜만에 갖는 자리였다. 생각해 보면, 가정생활, 직장생활을 영위하며 고비 고비 어려움을 넘어서 여기까지 온 위대한 분들이다.

대부분이 소규모 학교지만, 학교경영을 하면서 그 나름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며 여기까지 달려 온 것이다. 아무런 탈 없이 한 학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활짝 핀 웃음꽃으로 자축했다. 제한된 점심시간이라서 식사시간을 좀 줄이고, 인근에 근무하는 여교장님 학교에서 차 한 잔의 여유로움을 갖자고 급 제안을 했다. 오월의 어느 날 학교를 방문하게 됐는데, 교장실에 비치된 다기 세트로 따뜻한 차를 융숭하게 대접 받았던 기억 때문이었다. 모두들 흔쾌히 호응했다.

학교에 도착하니 빛 고운 차들과 다기세트가 정갈하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미리 전갈을 받은 모양새였다. 교장선생님은 학교를 방문하는 학부모는 물론, 모든 분들에게 이렇게 차를 대접하노라고 살짝 쿵 에둘러 자랑을 했다. 그 날은 오후에 학교행사가 있어 손님맞이 준비를 했던 차란다. 이른 아침부터 우려냈다는 백련 차. 동그만 유리그릇에 활짝 피어난 백련은 고매하기 그지없었다. 언젠가 영평사 주지스님이 커다란 함지박에 얼음을 동동 띄어 내어주던 백련 차 풍경이 떠올랐다.

연하 디 연한 색감에 은은한 향은 그야말로 최고의 기품을 뽐냈다. 부드러운 맛과 향기가 일품인 연꽃 차는 성질이 따뜻하여 혈액순환을 촉진하고 신경이 안정되며, 콜레스테롤과 혈압까지 낮추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하니 이보다 좋은 차가 또 있을까 싶다. 홍화꽃, 해당화, 귤피를 따뜻하게 우려낸 차를 차례차례 마셨다. 짧은 시간에 마신 다양한 차향이 묘하게 어우러져 입안을 맴돌았다. 그 향그러움에 영원히 취해 있고 싶은 욕심도 덩달아 일렁였다.

차 한 잔을 더할수록 교장선생님들의 얼굴은 고운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3월부터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지친 영혼에게 주는 차 한 잔의 평화와 여유로움이었다. 짧지만 긴 쉼이었다. 언제 이런 시간을 누릴 수 있었던가. 출근하는 순간부터 복작복작 달그락 달그락 그렇게 시간은 흘러 온 것이다. 돌아보면 사는 게 다 그렇다. 다람쥐 체바퀴 돌리듯 한정된 테두리에서 그저 열심히 한다고 자부하며 그저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산다. 그런데 때론, 그런 삶이 빛 좋은 개살구는 아닐는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이 맘 때면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산으로 휴가를 떠난다. 그 무리에 부담 없이 합류할 수는 없더라도 어느 하루쯤은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한 숲길을 걸으며 어딘가에서 나는 향내와 짙어 가는 녹음 속으로 스며들고 싶다. 하늘을 뒤덮는 병풍처럼 늘어진 더위가 들어서지 못하는 숲. 신선함에 취해 별세상 꿈길을 걷는 듯 황홀하고 완벽한 고요.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 주는 맑은 공기에 걸터앉아 빛 좋은 차들의 향내를 골고루 음미하다 보면 실타래처럼 엉켜있던 생각은 정갈해지고, 영혼이 맑아질 것만 같다.

저작권자 © 대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