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한글날 연휴에 가을비가 내렸다. 제한급수까지 실시되고 있는 우리 지역에는 더할 수 없는 반가운 손님이었다. 기온도 내려갔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더니 찬바람 불며 쌀쌀하기까지 하다. 한층 깊어진 가을이 눈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대부분의 조직에서는 월례회의가 있고 곁들여 직장연수를 하곤 한다. 10월 1일은 일터를 옮기고 두 번째 맞는 월례회의였다. 그 날도 반가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여느 때 같으면 비 내리는 출근길을 불만했겠지만 워낙 가뭄이 짙어 인근지역 모두 시범 제한 급수까지 시행한 터라 감지덕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더 많이 내려 달라 기원했다.

<가을수업>은 바로 그 날 만난 시(詩)다. 시라고 하면 짓지는 못해도, 밥 먹듯이 읽어 온 시가 몇 대 분의 트럭은 될 거라 자부하던 터였다. 그런데 그 시는 처음이었다. 한글날이 있는 10월 월례회 인사말을 하던 교육감님은 안준철 교사의 <가을수업>이란 시를 술술 낭송하셨다.‘책을 덮자 오늘은 영어시간이지만 모국어를 배우자 가을 영어로는 폴 혹은 오텀 어느 것도 가을스럽지 않구나 오늘은 모국어를 배우자 가을~ 입안에 양치물이 남아 있었니? 아니면 꽈리를 깨물었니? 가을 가실 가슬 갈... 갈바람 아이들아 오늘은 모국어를 배우자’<가을수업> 전문(全文)이다. 교육감님은 평교사 시절, 매달 이달의 시를 교실 뒤 게시판에 소개하곤 하셨단다. 어느 핸가 한글날이 있는 10월에 이 시를 소개하고 두레별로 토론했던 기억이 난다 하셨다. 모든 게 감동이었다.

낯선 시가 마음을 스쳐간 후, 못 견디게 그 시인이 궁금했다. 월례회의가 끝나고 자리에 앉자마자 검색을 했다. 안준철, 그는 교사 누구에게나 소개하고 싶은 멋진 사람이었다. 처음 담임을 맡았던 해, 제자들의 생일 때마다 써주었던 시를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를 펴냈단다. 겁주지 않고 호통 치지 않고도 아이들과 즐겁게 소통하는‘시나브로 소통법’(아이들이 시나브로 시나브로 변해가듯, 교사도 아이들에게로 천천히 젖어드는 것)을 알려주는가 하면, 제자들의 생일 때마다 시를 써주기도 하고, 악수종례, 쪽지통신에 이르기까지 상상력과 매력이 넘치는 교육을 실천해 오고 있었다. 그의 이력들을 찬찬히 살피다 보니 자연스레 자괴감이 일었다.

그는 또 해마다‘가을 수업’을 하고 있단다. 돈에 대한 환상을 갖기 쉬운 고만한 나이의 아이들에게 돈이 많고 적음과는 상관없이 쉽게 사귈 수 있는 다정하고 변함없는 자연이라는 좋은 벗을 소개해주고 싶어서라고 한다. 나도 모르게 그의 교육활동에 찬사를 보내며 지나온 교사의 삶을 반추했다.

요즘 아이들 쉽지가 않다. 막무가내인 경우도 그렇고, 압도적인 재난 앞에서까지도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떠든다.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선생노릇 하기가 참 어렵다고들 한다. 하지만 자꾸 엉킬 땐 자꾸 풀어줄 수밖엔. 마음대로 잘 되지 않을 땐 하나하나 천천히 풀어나갈 수밖엔. 시인 안준철 교사의 이력을 보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사로서의 활로를 개척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같은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어야 정신이 건강하다. 당연한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낼 줄 아는 힘, 혹은 괴로움이나 불행에 맞닥뜨렸을 때 그 에너지를 다른 것으로 전환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아프면 아픈 대로, 의욕이 없으면 없는 대로 우리는 파닥이며 살아간다. 이 비 그치고 나면 천지간에 청량함이 물들며 환한 햇살 번지는 투명한 가을날이 펼쳐질 것이다. 어려운 교육 현실의 슬픔을 가만히 짚어보면서 생각한다. 이미 있던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 새로운 것에서도 더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어렵게만 보이는 것들도 술술 풀리며 가을날처럼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지금은 가을수업 시즌이다.

저작권자 © 대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