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황금 빛 들판 다 사라지고 어느덧 11월이다. 나태주 시인이‘돌아가기엔 이미 와버렸고, 버리기엔 차마 아까운 시간’이라고 표현했던 달이다. 모두가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낮이 조금 더 짧아졌으나 빛 고운 추억들이 남아 있는 달이다. 12월을 남겨 두고는 있지만, 일이든 삶이든 놓친 것, 미진한 것들을 찬찬히 살펴서 갈무리해야 하는 달이다.

11월에는 외롭지 않은 사람도 괜히 마음이 스산해진다. 산그늘이 깔리듯 쓸쓸하다.

그래서인지 요즘 말도 헛으로 나온다. 엊그제는‘외독’하다고 말해 일행이 한바탕 웃었다.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길래 말이 다 그러느냐고 한마디씩 건넸다. 길을 가다가 마주친 풀꽃 한 송이에 눈을 주고 돌아선 발걸음처럼 마음단추가 풀어질 때가 많다. 불현 듯‘나’라는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지는 달. 누군가가 내 감정을 거울처럼 복사해서‘내가 여기에 비로소 존재하는 구나’하는 안도감을 느끼게 해줬으면 하는 날이 더 많아지는 달이다.

아이가 웃을 때 누군가 공감하고 같이 웃어주면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느낌이 일어난다고 한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따라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심리학 용어로 미러링(mirroring)이다. 반대로 내가 웃고 있는데도 아무도 내 감정에 공감해주지 않으면 공허하고 우울해진다.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여전히 누군가의 미러링을 필요로 한다.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심리적 갈증은 나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해주고 공감해주길 바라는데 그것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보면 제석천이 사는 천상의 세계에는 아름다운 그물망이 하늘 가득 펼쳐져 있다고 한다. 그 그물의 이음새마다 진귀한 구슬이 걸려 있는데 그 구슬들은 너무나도 투명하고 맑아서 거울처럼 서로서로의 모습을 하늘 가득 비추고 있다. 그 그물의 이미지를 생각할 때마다 우리 사람의 마음도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구슬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가 엄마의 표정을 비추고 반대로 또 엄마가 아이의 표정을 비추듯, 서로서로의 모습을 끊임없이 비추면서 살아야 건강해지는 존재가 사람이 아닌가 싶다. 혹시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충고나 문제를 풀어주려고 하기 전에 먼저, 충분히 거울이 되어 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비춰주었는지 돌아봐야겠다.

청사 내 단풍 든 나무들이 한없이 붉고 노랗고 한없이 환하다. 거기다 투명한 가을 햇살까지 품고 있으니 그 찬란함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그러고 보면 나무도 할 말이 참 많은 듯싶다. 각양각색의 잎으로 그 마음을 다 담아내고 있으니. 지금, 우리 청사는 화려한 외출을 감행한 국화꽃들까지 합세한 가을 풍경이 황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가을을 스치고 온 바람과 푸른 하늘을 지나 온 순한 햇살이 창을 넘어온다. 사는 일이 아무리 바쁘고 힘들다 해도 마음의 여유를 두고 살 일이다. 여백이 있는 그림이 더 운치가 있고 여운을 남기듯이. 지울 수 없는 이름들이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이다. 오늘도 나는 무조건 짬을 내 가을빛에 발목 좀 잡혀줘야겠다.

저작권자 © 대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