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도교육청 장학관 신경희

첫눈이 함박눈으로 왔다. 그날은 외부행사로 부안에서 내소사를 거쳐 올라오던 길이었다. 마음 준비도 안됐는데 순식간에 은빛세상이 돼버렸다. 첫눈이 그렇게 와서는 안 되는데. 가을이 미처 떠나기도 전에 겨울을 알리는 고지서처럼 첫눈은 그렇게 배달되었다. 그 날은 민주화의 큰 산이자 개혁정치의 큰 강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마지막 배웅길이기도 했다. 버스 안 모니터에서는 영결식 중계방송이 음악처럼 흘렀다. 알싸하던 가을은 그렇게 흔적 없이 사라졌다.

거북이걸음 운전으로 어렵사리 퇴근을 했다. 약속은 없었지만 어디론가 가야 할 곳이 있어야만 될 것 같은 날. 누군가를 만나야만 할 것 같아 서성거렸다.‘첫눈이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단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던 시 구절이 생각났다. 첫눈이 온다. 누가 온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건 큰 축복이다. 신록처럼 젊은 날. 첫눈이 내릴 때 만나자던 약속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첫눈이 내린다는 절기인 소설(小雪)에 가을비가 소곤소곤 내렸다. 다음날 새벽 서울에서 진눈깨비로 첫눈이 확인됐다는 뉴스를 출근길에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첫눈은 보통 시늉만 하는 정도였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많이 내린 첫눈은 없었다. 누군가는 그랬다. 첫 순정, 첫사랑 그리움이 일 년을 달려 첫눈이 되는 거라고. 고백 못한 사랑들이 눈 편지되어 날아드는 거라고. 고백 못한 사랑, 얼마나 많은 그리움들이 하늘로 올라가 첫눈이 되어 내린 것일까. 그 첫눈으로 가슴을 문지르면 내 숨겨놓은 그리움도 좀 숨 막히지 않을 수 있을까.

첫눈을 생각한다.‘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하나가 시린 허공을 건너와 메마른 내 손등을 적신다’던 김용택 시인의‘첫눈’이 떠오른다. 보고 싶은 이들의 이름이 하얀 눈에 발자국 나듯 점점이 이어진다. 묘한 기대와 그리움. 달달한 첫사랑의 추억. 짜릿한 고백으로 가슴은 한없이 바운스 바운스. 그 시절은 온데간데없다. 미끄러운 출퇴근길만 남아 있다.

묘하게도 이정석에‘첫눈이 온다구요’노랫말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첫눈이 내리는 날 안동역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트로트 가사만이 입안에서 돌고 돈다.‘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 안 오는 건지 못 오는 건지 대답 없는 사람아 기다리는 내 마음만 녹고 녹는다. 밤이 깊은 안동역에서’까닭 없이 절절하다.

한동안 화려한 단풍으로 눈이, 가슴이 호사를 누렸다. 이제는 다 내려놓았다. 미련과 집착, 욕심으로 허우적대지만 모든 걸 비워버린 자연의 몸에서 또 배운다. 책상에 아직 못 다본 몇 권의 책. 바람을 몰고 온 흔적들. 퇴근길에 바라다 본 휑한 들판의 여운이 남아 길어지는 밤을 더욱 짧게 만들고 있다. 또 하나의 연륜이 늘어난다는 고민이 깊어진다.

열병의 흔적처럼 오톨오톨하던 마음의 내벽위에도 하얗게 첫눈이 내렸다. 산다는 건 첫눈 같은 환의인지도 모른다. 매일 매일이 우주에서의 만남이고 첫 입맞춤이기 때문이다. 하얀 눈꽃. 은빛세상. 첫눈은 그저 올해의 끝자락을 향해 질주하는 계절의 바로미터만은 아니다. ‘손톱 끝에 봉숭아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그 말을 오롯이 믿을 수 있는 삶으로 잠시나마 돌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근심으로 삶을 받들어도 하얀 눈의 평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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