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는 햇살이 창을 들쑤시다 지쳤는지 방안은 오직 서툰 적막뿐이다 어둠을 세워두지도 않았는데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비명 같은 고요 아무도 채우지 않은 커피잔처럼 창밖은 웃음기가 싹 말랐다 해무에 지워진 뱃길이 파도 밑을 겉돌다 쓸려나가는 수평선을 바라보듯 정수리에 빨갛게
유리병 살다 간 흔적이 너무 먼 폐가처럼 홀딱 속이 뒤집어진 유리병이 반쯤 포기한 채 묻혀 있다 한때 누군가에게 가장 절실하게 들렸을 순간들이 다 지워져서였을까 속에는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속을 비웠을 텐데 상처 하나 없다 무엇을 저토록 깊이 감추고 있기에
꿈의 두께 꿈을 꾸다가 물 바닥을 엎어놓고 올라오는 섬을 본다 배가 지나가다 물살을 밀어내면 다시 꿈으로 돌아오는 섬 파도를 모았다가 풀어주고 가끔은 갈매기도 불러와 둥지를 틀고 수평선에 낀 구름을 데려다 비도 부르는 그 섬의 꿈 석류꽃처럼 솟아오르는 아침놀을 바다 위에서 바라
미로 이야기 숲에서 잠든 풍경은 계절을 감추지 않는다 휘청거리는 시간을 따라 새가 울음을 던져버리듯이 부끄럽지 않게 빠져나가는 미로 어디 한번 제대로 웃어본 적이 있던가 씁쓸하게 뒷머리를 만지며 냉동고에 넣어둔 세월처럼 두텁게 잊고 지낸 적이 없던가 날마다 삶의 길이를 묶어놓은 달력처럼 손쉽게 넘겨버린 적은 없던가 계
달무리 보름달이 또 나뭇가지 위를 걷는다 묵직한 숨이 걸려 나뭇잎이 붉게 메마르는 동공 돌아갈 곳도 없이 떨어지는 침묵이 계절의 끝에 걸린다 보릿고개 넘기다 잘록해진 허리띠처럼 눈물까지 희미해진 빈집 같은 한밤중 혼잣말로 부르다 부르다 잠이 된다 몇 날을 묶어야 비가 오나 하
기억나지 않는 오후 흔들리지 않기 위해 걷는다 잔가지만 휘청거리는 바람 속으로 멀리서도 시간을 앞질러 간 오후가 보이지 않는다 벽 속에 촘촘히 접어두었던 기억들이 여우불처럼 까닭 없이 캄캄한 곳에서 튀어오르다 잠깐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머리를 깊숙이 감춘 책갈
물낯 3월의 한낮을 밟아오는 물소리가 짙다 발가락 하나 없이 온종일 걸어도 시큰둥하지 않는 물소리 지나올 때마다 그림이 바뀌고 몸과 마음이 다 잠겨도 언제나 한결같은 소리를 품기 위해 걷는다 산길이 좁아 급히 떨어질 때도 목소리를 높여 냉냉한 산새를 깨우고 한여름의 하늘
빗속을 걸어가다 비는 위아래로 곁눈질하지 않는다 더 많이 걸어가면 더 많이 쌓이는 여정처럼 어느 한 곳에서 제멋대로 멈춘다 팽팽한 숲속에서 길을 잃는 망설임이 살갗을 대자 스스로 젖어버린다 사진을 오려놓은 것처럼 늘 속고 있다 발끝에 차이는 시간 비는 오는 시간을
겨울빛 비밖에 모르도록 푸른 몸을 피우는 봄은 아직도 서툴다 숲이 누운 하늘을 쳐다보다 하얗게 눈을 모은다 산을 넘어오던 거친 빛처럼 얼어붙은 들녘 새들이 모아놓은 저녁놀이 하얗게 흩어진다 뾰족한 겨울바람에 등이 휜 구름이 눈을 흘리는 저녁 밥상이 거칠다 손보다 눈이 먼저 언 가족들의
그 자리에 없는 단비를 맞은 해바라기는 눈썹을 깜박이지 않는다 서쪽에서 부는 바람이 숲을 적시는 한 낮에도 아침을 불러들인 새들이 조금씩 밟아가는 하늘길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는 것처럼 처마 밑에 세워둔 빗줄기를 보라 누가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저렇게 땅에게 다가가고 있잖은가
보이지 않는 것들에게 빛을 가두지 못한 밤이 뜨거웠던 낮을 접는다 온기가 말라버린 기억 발밑에 묻어둔 시간이 흩어진다 주눅 든 겨울 호수의 물결처럼 주머니 안에 움켜쥔 바람은 빠지지 않았다 숨어 있으라고 숨어 있을 거라고 말할 때까지 감출 수 없는
손안의 그림 그건 당신의 얼굴인가요 묻는다 잠시간의 흔들림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는 숲 같은 떨림이 깊어진다 외길을 따라 늘어선 나뭇가지들이 지나온 길들을 선명하게 늘어놓는다 아직도 가야 할 낯설은 땅들 분리되지 않는 눈들이 힘들게 구름을 헤치는 해를 본다 바람이 언덕을 넘어
머그잔 꽃 슨 밤하늘이 저렇게 웃고 있잖아 모두가 비워두었을 때 온 밤을 꼬박 영혼이 담긴 별을 딛고 있었어 금지된 침묵이 자라고 있었지만 마음이 채워지지 않아 기다리기로 한 시간을 꺼냈지 손이 따뜻했어 입김을 옮겨 놓았을 때처럼 창밖에는 풍경이 서 있었고 강을 넘어오던 새벽은 놀에
멀리서 멀리서 빛의 손이 다가온다 흔들리는 겨울 따뜻함을 기대했던 모든 것들이 제 몸을 세우며 들뜬다 소리가 들지 않는 땅 밑의 어둠 속에서도 발돋움으로 세상을 미는 발들 꼬리가 긴 겨울의 등 뒤로 아픈 편지를 읽는 동안 작은 날개가 빛나는 새들이 모여든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 귓
다리를 건너서 말을 걸기도 벅차다 다리에 빠진 숨이 가쁜 저녁놀 어둠을 건너는 자동차들의 빠른 몸동작 틈과 틈 사이를 어지럽게 끼어드는 사람들 저녁을 삼키는 도심의 빛들 하루종일 서둘렀던 온기들을 재운다 아무것도 누구도 가끔 흘린 시간도 돌아보지 않는 빈 공간만 적혀 있다 더
첫 만남달력에도 없는 만남이 물 위를 걸어온다흔들리지 않는 바람이 오래도록손가락을 세던 날아무것도 적어두지 않은 흰 눈 같은 기억기다림이 들어갈 빈 곳을 찾아너를 적어둔다하나하나 적어두어야 할 것이 너무 많은 너만남은 오랜 기다림의 껍질이 벗겨지는 것너에게로 가는 내 문장을 꼼꼼히 읽는다눈 밖의 계절이 시간을 밀고 들어오는 오후동그라미를 옮겨 놓을 때마다첫 꿈을 기억하는 빛이 살아난다물숨을 참아온 바다의 깊이처럼빛낯이 하루의 체온을 채운다만남을 오려 넣으면 희망이 자라는 여백들아무도 없는 곳에서 풀이 되고 싶은 나귀가 작은 꿈이 옮